사실의 발견-발견된 흔적-흔적의 채록-다시 사실로

 

 

홍경한(미술평론가)

 

작가 전리해는 지난 9월 개최된 서울시립미술관 남서울 분관에서의 전시 <SeMA shot : 공허한 제국> 전에 영상 작품 <언니Ⅰ>을 출품해 관람객들의 주목을 받았다. 윤락가에서 삶을 이어가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이 작품은 ‘그녀’가 어떤 경로로, 무슨 이유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을 관찰자의 시선으로 풀어놓았는데, 스펙터클함은 엿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이 되레 낮고 조용한 ‘울림’을 선사했다는 평가를 이끌었다.

 

특히 물 흐르듯 이어지는 영상을 보며 많은 관람객들은 누군가의 ‘낮’처럼 생계를 위해 사는 그들의 ‘밤’이 ‘불법’이라는 명사 아래 있다하여 문제해결이 될 수 있는지 스스로 되물었고, 우리 사회에 놓인 이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지 자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예술의 사회적 확장성을 염두에 두도록 한 작품이라는 긍정성도 획득했다. 그러나 전리해는 이 작업 이전만 해도 영상 보다는 회화 및 사진작가로써 지속적으로 활동해 왔다. 전시경력도 주로 그 방향에서 고착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언니Ⅰ> 이전의 작품들에서 그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일상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도시 공간 속 낡은 벽이었다. 이 벽은 단순히 시멘트로 쌓아 올린 수직 건조물이 아니라 세월의 간극을 메우듯 먼지 쌓인 곳, 시간과 공간을 함축하는 의미를 지니는 장소였다. 때문에 그가 발견하고 촬영해 그려 다시 내건 것들 역시 무언가의 흔적이 진한 곳이 다수를 이뤘으며, 이는 이미 머물다 떠난 자리, 삶의 다양성을 지근거리에서 마주할 수 있는 터전, 늘 옆에 있으나 무심히 지나치고 마는 오밀조밀한 골목 등이었다.

 

작가는 이곳에서 시간(사람에 의한, 시간에 의한, 기타 어떤 보이지 않는 무엇에 의한)을 기록했으며, 수년 전부터 <흔적의 경관>을 비롯해 <장소의 흔적(Traces-in-place)>, <Where should place this?> 등의 이름으로 공간의 변화를 화면에 옮겼다. 물론 그 시공 ‘사이’에는 장소성, 정체성 등이 배어 있었고, 작가는 손수 그린 작품을 다시 현장에 설치한 후 촬영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게 된 벽을 만들었다. 이는 결국 어떤 의미가 담긴 / 담겼다고 판단한 대상에 접근해 감정을 공유하고 그 공유된 기억을 사진으로 촬영해 회화로 복원한 후 다시 현장에 설치함으로써 비워진 기억 / 쓸려나간 기억 / 기억해야할 기억 등을 소환하거나 회복하는 과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회화와 사진의 적절한 조화’를 통해 동시대미술의 탈형식성을 증명하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필자에겐 이러한 작업 과정이 신선하게 다가오진 않았다. 형식의 탈범주화가 (당연히)전리해만의 특허도 아니었고, 시공의 문제를 비롯해, 자신의 정체성, 자아, 실존에 대한 탐구, 공간성과 시간성, 흔적 및 채록, 기억과 환류 등의 다양한 수사들 또한 낯선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다. 왜냐하면 동시대미술에서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주목하고 장르 간-학제 간 융합, 도그마의 완전한 침식 및 하이브리디티의 팽창, 텍스트와 이미지의 조합, 장르 간 경계의 무력화 등은 잡목림적 군락이라는 지형 아래 이미 수십 년 전부터 견고해져 온데다, 발견 및 현상의 체화와 그의 일부 작업에서 엿보이는 예술주체의 전환, 인터렉티브형 작품 등도 21.5세기에 접어든 오늘날의 미술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경향이라 해도 그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자주 언급되는 동양화와 사진, 회화와 사진, 순수예술과 기계적 메커니즘의 ‘융합’만을 놓고 얘기해도 매한가지다. 이미 미술사는 물리적 결과물과 비물리적 행위의 경계를 무기력하게 만든 잭슨폴록(Jackson Pollock)의 추상회화를 1940년대부터 기록하고 있으며, 회화와 음악의 만남을 추구한 파울 클레(Paul Klee)나 일상과 예술의 선긋기마저 무너뜨린 요셉보이스(Joseph Beuys) 등과 같은 고전적 사례, 뮤지컬과 팝뮤직을 섞은 팝페라(popera), 무용과 연극의 경계를 없앤 독일 안무가 피나 바우쉬(Pina Bausch)의 탄츠테아터(tanztheater), 하위문화로 인식되어 온 펑크 문화의 야성적인 측면을 고유한 예술적인 공간에서 화려하게 접목한 뉴욕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펑크 카오스 투 쿠튀르(Punk Chaos to Couture)’ 전에서조차 (추구하는 목적은 서로 상이하지만)그와 유사한 양태는 숱하게 내보여왔던 탓이다.

 

특히 그게 무엇이든 이종교합이나 경계의 희석에 따른 표상은 ‘공간성’을 전제로 하고 있기에 공간에 대한 기술(記述) 역시 새로운 건 아니었다. 시간을 텃밭으로 한 공간과 이주된 모든 것들에 관한 기억과 흔적, 채록의 이미지, 정체성의 투영을 주제로 한 작품들은 이미 너무도 많은데다, 한발 더 나아가 많은 작품들에서 교조주의의 탈구축과 기존 틀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왕래, 이동을 통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영역확장, 새로운 가능성 모색 등의 정신적, 물리적, 관념적 여정과 맞물린 모든 상태를 지정해 왔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리해의 사진 작업이 갖는 특이성은 사실상 별로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필자가 눈여겨 본 것은 작품에 투영되어 있는 내용이다. 즉, 전리해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담고자 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핵심이 있다는 것이다. 일례로 전리해의 ‘벽’ 시리즈는 갑작스러운 도시개발 열풍 속에 소외된 사각지대를 담고 있다.(=벽 자체가 아닌 사각지대가 포인트다) 자신을 중심으로 한 시대에 대한 고찰과 비판적 의식이 깃들어있다.(=자신의 정체성을 말하지만 그 내부엔 우리 사회의 이면이 깃들어 있다) 떠나간 이들, 방치된 공간 등을 통해 현실을 일깨우는 메시지가 녹아 있고(=사진과 회화의 접목이 중요하다기 보단 ‘발언’에 방점이 있다) 세상살이에 지친 이들의 감정, 시각적 생산물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가혹함이 세월의 층위에 배어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지난 9월 선보인 <언니Ⅰ>도 우리 사회 이면에 놓인 채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앞서 작업과 연결성을 지닌다. 그는 <작가대전> 세 번째 미션에서도 <미러링 스피치>라는 작품을 통해 여성혐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 주제는 작가의 주제의식에서 간혹 / 언뜻 언뜻 되살아나 배회한다.)

 

더구나 그의 작품들은 대상의 삶에 관여(개입)하지만 직접적이진 않으며, 세상의 한 단면을 직시한 채 순간을 투사하면서도 난해하지 않다. 오직 그들이 / 그것이 실존했다는 사실을 은폐하지 않는 정도의 냉정함만 있을 뿐이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단락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은유한 채 시시한 것, 소소한 것, 일상적인 것에 대한 외면이 되레 도피일 수도 있음을 역설하는 그의 작품들은 당대 누구나 마주하는 문제를 그리되 괴팍하거나 요란스럽지 않다. 물론 시각적 강렬함 혹은 의식을 후비는 지독한 욱신거림도 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사회와 예술을 잇는 시냅스(synapse)로서 무가치할 수 있는 부분에 눈길을 덧대어 진단하고 인식의 틈을 메우는 깊은 잔상과 사유의 울림은 확연하다는 것에 있다. 필자는 이 지점에서 전리해 작업의 가치를 엿볼 수 있었고, <작가대전>이 펼쳐지는 동안 가장 큰 매력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이를 그의 말을 빌려 표현하면, 어떤 재현이 아닌, 제시-사회적 맥락을 도외시 하지 않는 ‘제시’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는 형식과는 별 상관없는/ 혹은 내용을 위해서라면 방식은 언제나 변화할 수 있는 단계에 있음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의 다른 말은 곧 사실에서 발견된 흔적, 흔적과 채록을 넘어선 사실로의 회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최근 전리해가 공들여 영상 작업에 매진한 건 유의미하다. 미술, 생태, 권력이라는 주제 아래 5명이 의기투합해 팀으로 선보인 <작가대전>에서의 작품 <수창 꽃이 피었습니다> 이후 선보인 그의 영상작품은 전리해의 작업 방향이 내용에 따라 형식이 다변화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또한 향후 그의 작업이 어떻게 확장되고 사회적 맥락을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하나의 기준점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서 눈여겨봐야할 ‘흐름’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