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역사를 찾아서
김장언 / 큐레이터 미술평론가
이 인터뷰는 K’ARTS 창작 스튜디오의 입주작가 결과보고전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작가 전리해는 나에게 연락을 주었고, 나는 작가를 개인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전시장에서 만났으며, 인터뷰는 이후 이메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작가는 자신의 연작 제목이기도 한, ‘사람, 장소, 생각 그리고 그 사이’처럼 자신과 사람들 그리고 장소와 사물들 사이에서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감정의 역사를 찾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장언(이하 김): 사진이라는 매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전리해(이하 전): 사진은 개인의 정서적인 삶의 근원을 드러내고 사적인 순간들을 기억합니다. 정서적으로 의미 있는 것을 사진으로 찍는 행위가 삶을 지탱하는 방편이 되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 시대를 증언하는 자료가 됩니다. 또, 작가의 주관적인 관점과 아이디어만 있다면 실제 세계의 모든 것을 작품의 주제로 삼을 수 있는 매체라고 생각합니다.
김: <사람, 장소, 생각 그리고 그 사이> 연작과 <_> 연작, <서성로의 집>, <흔적의 경관>은 공간에 대한 관심이기도 하지만, 한편, 대상과 이미지에 대한 탐구 같기도 합니다. 이 프로젝트를 통해서 탐구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고 어떤 성취를 이룬 것 같은지요?
전: 저는 어떤 활동이나 사건으로 인해 특정 장소에 처해 있음으로써 촉발되는 감정들을 아카이빙하고 그 감정의 매개가 되는 대상과 이미지에 집중합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벽은 잃어버린 대상, 결코 되찾아지지 않고, 반복적으로 찾아 헤매게 되는 대상이 됩니다. 작업은 어릴 적 자랐던 집과 동네에 대한 추억을 바탕으로 단순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출발합니다. 1990년대 중반 유년 시절을 보냈던 동네를 찾아가서 낡고 오래된 벽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마주한 벽은 자연의 형태와 도시의 기호 사이에 경계가 모호해지는 구분이 불가능한 상태로 놓여 있었습니다. 그런 벽 앞에서 묵묵히 감춰온 감정을 끄집어내고 ‘감정의 역사’를 되돌아보았습니다. 한순간에 전 재산을 잃어도 이상할 게 없었던 그 시절의(1997년) 위기는 현재의 삶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드리우고 불안의 감정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습니다. 아픔을 통해 내 삶이 어떻게 이뤄져 왔는지 마주해 보면서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그 속에서 가능성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오래된 벽은 어린 기억으로부터 보편의 사건을 끌어내고, 삶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흔적을 보여줍니다. 저는 작업을 통해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수 없는 시간의 흔적을 다시 우리 앞에 소환해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감정을 해소하고, 미래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찾고자 했습니다.
김: <글씨 교본>은 기존의 작업들과 다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이 작업을 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전: 저는 리서치를 기반으로 <자갈마당>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자갈마당 인근 주민들 인터뷰에서 성매매집결지가 바로 앞에 존재하는 것보다 학생들이 스마트폰으로 매일 보는 선정적인 것들이 더 무섭다는 대답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거기에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학생들이 우상으로 생각하는 아이돌 걸그룹의 자극적인 가사만 발췌하여 글씨 교본 책자를 만들었습니다. 전시장에 관람객이 와서 가사를 써보면서 의미를 다시 되새겨보는 작업입니다.
김: 집창촌에 대한 방어적 언술이 걸그룹에 대한 연구로 나아가게 된 것이군요. 단순히 가사를 다시 쓰면서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에 국한되는 것인가요? 다른 의도가 있었는지요?
전 : <글씨 교본>(2015)은 지나치게 편향된 시각에서 나온 가사의 문제점들을 파악하고, 미디어와 텍스트 속의 젠더가 재현되고 있는 방식을 작업화 한 것입니다. 이는 여전히 여성을 욕망의 대상이자 전시의 대상으로 평가하거나 관음적 소비의 이미지로 고립시키며, 자극적 선정주의와 획일화된 젠더 이미지를 재생산시키는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김: <매개된 자극>에서부터 사물에 대한 관심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 같습니다. <자갈 마당> 시리즈에서도 집창촌이라는 맥락을 떠나서 사진들은 한편, 사물들에 집중하기도 합니다. 본인에게 사물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요?
전: 사물은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그대로 지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곳에 살았던 누군가의 일부분이고,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됩니다. 결코 사라지지 않는 과거가 남긴 결과물이며 그 흔적은 누군가의 부재의 현존을 의미합니다. 제 작업에서는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며 사건과 행동도 재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존하는 누군가의 사물이 전시됨으로써 스스로의 매개성을 드러내며 그 소유자의 사회적 존재 방식도 드러나게 됩니다.
김: 소유자의 사회적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것으로써 사물을 주목한다고 이해됩니다. 이 부분에 다가가기 위한 작가로서 자신의 방법론은 무엇인지요?
전 : 사물이 사건화되는 방식 즉, 그 사물과 엮인 수수께끼 같은 사건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사물은 부조리한 세계 뒤편에 있는 상상적인 것으로 어떤 장소와 관련된 내재적인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엎어진 침대, 깨진 유리 조각, 바랜 벽지, 호랑이 액자, 우편물, 옷(홀복), 도구(타이머, 가글, 약) 같은 구체적인 사물들은 그들을 둘러싼 열악하고 가난한 환경을 형상화하며, 그들의 상황(사회적 지위)과 사건을 추측하게 만듭니다. 결국 사건은 보이는 대신 상상과 추측으로 구성되며, 보이는 이미지는 사물의 흔적으로서만 드러내고 있습니다. 제 작업은 프레임 경계에서 머무르지 않고 밖으로 확장하며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합니다.
김: <태연한 기울기> 연작은 그 내용을 떠나서 상당히 연극적인 사진으로 보입니다. 의도된 것인지 궁금합니다. 또한, 어두운 방에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사진을 배치하고 이미지를 투사시킨 설치 방식은 어떻게 결정된 것인지도 궁금합니다.
전: 태연한 기울기(2016)는 자갈마당 인근에 자리한 북성로 일대와 동물원을 흑백으로 담아낸 연작입니다. 사진으로 재현하는 데에 있어서 회화적 요소와 섬세한 연출이 개입되었습니다. 사진 속 타자들은 정적인 포즈로, 누군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사실에 반응하지 않은 채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또, 회화적 화면과 몰입적 구도, 인위적 구성이 어우러지는 것으로 현실을 직면하지만 날 것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관람객의 새로운 해석을 열어 두고 있습니다. 또한, 전시 공간은 관객의 시각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사진 속의 현실에 더 깊이 몰입하여 관람 할 수 있는 설치방식을 생각했습니다. 8개의 테이블은 타자를 온전히 인식하기 위한 장치로서, 타자의 세계와 관람객 사이에 균형과 적극적인 들여다보기를 유도하며 다양한 동선을 그리면서 관람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설치 방식을 구현했습니다.
김: <흰 밤, 검은 낮> 시리즈는 <자갈마당> 시리즈와 연결되면서도 분리되는 것 같습니다. 이 둘 사이의 다른 점과 같은 점은 무엇인가요?
전: 두 시리즈의 작업은 2015년부터 성매매집결지 ‘자갈마당’에 관한 관심을 두고 다뤄 온 것입니다. <자갈마당>(2015~2018)은 한 여성의 구조요청으로 인해 활동가들과 함께 방문했던 업소 내부와 외부를 촬영한 사진입니다. 자갈마당을 중심으로 그 주변부의 낮과 밤의 모습들, 서로 동조하거나 기생하며 그곳에 남겨져 있는 한물간 공간의 흔적을 사진으로 담았습니다. 작업은 정지한 듯한 시간으로 들어가 어둡고 거대한 침묵의 공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특정한 시간 동안 제한된 그곳에 머물 수 있었으며 비록 한시적이지만 나의 감각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흰 밤 검은 낮>(2019)은 자갈마당 폐쇄 이후 파괴되어가는 건물과 그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을 기록한 사진입니다. 이곳은 100년 넘는 흑역사를 뒤로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한 자리에서 여러 번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 다시 지어졌다가 결국 무너졌던 성매매집결지의 장소를 기록한 것으로 사람들이 더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우리가 들을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는 작업이었습니다.
김: 장소(place)의 부재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요? 아니면 장소가 공간(space)이 되는 과정에 관심이 있는 것인지요? 혹시 비장소(non-place)에 더욱 흥미있어 하나요?
전: 저는 특정 공간을 지속해서 응시하고 그 공간을 경험하면서, 그로 인해 형성되는 장소 정체성에 관심이 많습니다. 초기에는 한 공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발생하는 어떤 행위와 변화하는 모습, 사라져가는 것들을 작가의 시점으로 작업했습니다. 최근에는 사회적 이슈와 장소가 연결되면서 어떤 사건의 현장이 그 자체로 중요한 주제로 다뤄지며, 그 속에서 재구성된 이야기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김: 환경, 젠더, 도시개발 등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한편 공간, 소리, 언어 등 비물질적 매체에 대한 관심이 공존하는 것 같습니다. 이 둘에 접근하고 결합하는 자신의 방법론은 무엇인지요?
전 : 저는 환경, 젠더 이슈, 도시개발에 대한 관심을 전시와 사진집 출간, 구조 활동, 성평등 매뉴얼 구축 등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사진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은 타 장르 예술가와 협업을 통해 작업 방식의 스펙트럼을 넓히고 있습니다. 최근에 작업한 <호함가>는 소리꾼과 협업한 사운드 작업으로 인왕산 호랑이의 고통, 침묵 된 것에 대한 이야기를 판소리로 작창 한 것입니다. 죽은 호랑이의 비명과 사람들이 호랑이를 배우는 방식, 물과 바람처럼 자연적인 존재이며 인간의 운명과 연결되어있는 실제적 존재로서 호랑이에 대한 내용입니다. 작업은 자본과 권력으로 인해 침묵하고 있는 목소리를 발언합니다. 저는 이들의 현실을 비물질적 매체 안으로 가져와 편집하면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깹니다. 사실인지 허구인지 결정할 수 없는 불확실성을 생산하여 자신의 주변부에 존재하는 타자를 인식하고 그 가치를 주목하여 사회적 관계를 나타내고자 합니다.
김: 협업은 전리해씨의 작업에서 중요한 부분인 것 같습니다. 협업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군요.
전: 평소 공동으로 작업을 생산하는 협업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타 장르 예술가와의 협동과 협력 활동은 홀로 고립된 채로 작업하는 저에게 소통의 기회를 주고 정보망을 확장합니다. 꾸준한 교류를 통해 관계를 형성해나가며, 어떤 이슈를 공유하고 탐구하면서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고 제가 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에게 무언가를 끊임없이 느끼고, 무엇인가를 배우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김: 당신은 사진가라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전 : 사진 작업의 양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사진작가라고 불리고 있지만, 저 스스로 미술가라고 생각합니다. 제 작업이 사진이라는 장르 안에 온전히 머무르지 않고 여러 카테고리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보통 하나의 장르로 선택해야 하는 전시나 공모에 참여해 보면 항상 애매함을 느낍니다. 저는 매 순간 다가오는 생의 느낌을 기록하고, 그것을 물질과 비물질로 작업화 할 수 있는 미술가로 불리고 싶습니다.
김장언
김장언은 평론가이자 큐레이터이다. 대안공간 풀 큐레이터(2001-2002), 안양공공예술재단 예술팀장(2006-2007), 제7회 광주비엔날레 <제안전> 큐레이터(2008),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기획2팀장(2014-2016),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2018 디렉토리얼 컬렉티브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비평집 『미술과 정치적인 것의 가장자리에서』(현실문화연구, 2012)와 『불가능한 대화 - 미술과 글쓰기』(미디어버스, 2018)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