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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이’의 편만한 다른 공간

    정 훈/계명대학교 사진미디어전공 교수    

 

전리해의 <태연한 기울기>는 일차적으로 관객의 다중적인 감각적 체험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관람자는 전시공간 속에서 작가가 의도한 자각의 맥락을 수행적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유도된다. 우선 그녀의 작업에는 크게 두 개의 층위에 놓인 타자의 일상이 있다. 하나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작가가 거주하던 주변지역의 인물들과 그 일상적 공간을 흑백으로 재현한 것이며, 다른 하나는 주변임에도 불구하고 특정한 장소를 광학적으로 끌어당기거나 훔쳐보는 듯한 거리두기의 시선으로 컬러의 기울어진 프레이밍 속에 각인한 것이다. 이 일련의 일상은 모두 작가의 주변을 둘러싸는 실재를 가시화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무언가 거리감이 있어 보이는 이미지처럼 제도화된 지도와 역사 속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공간의 일상(성매매 집결지에서의 삶)을 함의한다. 즉 전리해의 <태연한 기울기>는 실재하지만 일상에서는 망각적인 공간과 관련한 사회적 의미의 관계망에 초점이 맞춰져있는 작업이다. 우리의 주변에 포함되면서도 제도나 사회적으로는 배제되는 모호한 위상에 놓여있는 장소, 일상에 깊숙이 개입되어있으면서도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제외된 채로 존재하는 반-장소(counter-site)로서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를 둘러싼 의미체계를 감지하게끔 하고 있는 것이다. 

 

푸코가 <다른 공간들에 관하여 (The Other Spaces)>라는 글에서 미완의 개념으로 남겨둔 헤테로토피아는 유토피아처럼 실재하는 다른 모든 장소들의 배치에 깊숙이 연결되어있으면서도 그러한 배치의 원리로부터는 단절되거나 위배되는 장소이다. 하지만 관념적인 기준으로만 제시될 수 있는 유토피아와는 달리 실질적인 장소로서 이 사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화된 유토피아(무한히 열려있으면서도 동시에 끝없이 폐쇄적인)를 지칭한다. 푸코는 자신의 글에서 유토피아를 그 자체의 형식으로서 완벽한 사회이거나 오히려 기존의 사회를 전도시켜버린 반-사회적 공간으로 보았는데, 이는 아마도 유토피아가 처음으로 제시된 토마스 모어의 소설에 삽입되어진 그림(한 사람의 지배와 감시를 통해 외부인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는 고립된 섬)이 갖는 이중적 의미를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유토피아에 내재하는 통제와 소외의 이중성은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를 규정하는 원리 중의 하나인 고립적이면서 침투 가능한 양가적인 체계와도 맞닿아 있다. 즉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그곳에 있어도 끊임없이 미묘하게 그 장소로부터 배제되어버리게 하는 체계, 다시 말해 안과 밖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양립하는 환영적인 장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실질적인 위치를 지시할 수는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이 되어버리는 곳으로 정의되는 수수께끼적인 헤테로토피아는 모더니티의 이상적 모델이면서도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유토피아적 속성을 지닌 장소라는 점에서 독자적인 위상을 지닌다. 그리고 이러한 면모는 헤테로토피아가 오로지 시선과 응시의 체계로 구성되는 임의적인 공간임을 암시한다.         

        

전리해의 <태연한 기울기>는 이러한 푸코적인 헤테로토피아를 전시의 맥락 속에서 경험케 한다. 그녀의 전시는 크게 열린 공간과 폐쇄적인 방으로 이뤄지며, 전자에는 소시민의 삶을 촬영한 흑백의 사진작업들이 전시장 가운데에 배치된 일련의 목재테이블 위에 놓이도록 구성된다. 그리고 이러한 디스플레이 방식은 관람자가 마치 생태박물관에 화석화되어있는 표본을 보는 것 같은 바라보기 행위를 자연스레 수행하게끔 한다. 한편 흑백 사진작업이 설치된 공간에서 폐쇄적인 방의 입구로 향하는 통로에 서있는 방의 외벽에는 가상의 인터뷰가 액자로 전시되는데, “유리방 인터뷰”라고 명명된 이 작업은 가상의 성매매자가 자신을 향한 관습적인 시선(가령 피해자로서 가슴 저미는 성매매자의 사연을 기대하는 등)을 지닌 가상의 기자를 향해 그러한 편향적인 시선이 일상적인 것으로 되어버린 모순적 현상을 되짚는 독백으로 이뤄진다. 방으로 들어서면 작가의 작업실 주변에 위치한 성매매 장소를 거리감 있게 촬영한 사진들과 백 년이 넘는 그곳의 역사를 가사에 실은 판소리가 편집된 영상작업이 흐르고, 한쪽 모퉁이에는 초등학교 책걸상 위에 아이돌 걸그룹 노래가사의 일부를 관객이 직접 써보도록 유도하는 “글씨 교본” 작업이 배치되어있다. 다시 말해 이 방은 성매매 지역의 삶을 고립적인 타자의 그것으로 바라보는 관습적이고 배타적인 사회적 시선의 실재와 이와는 위배되게 육체의 상품화를 자극하고 당연시하는 문화적 환경을 환유하는 장치들로 이뤄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치들은 관람자가 이중적인 잣대가 작용하는 관습적인 시선과 문화적 행위의 주체자일 수도 있는 스스로의 응시로부터 외화 하여 자신의 일상적인 행위에 각인된 의미체계를 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처럼 수행적인 행위를 전제하는 전리해의 작업은 우리의 주변에 있으면서도 일상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척되는 공간에 작용하는 이중구속적인 얼개가 문화적인 영역에서 펼쳐지는 지극히 관습적이고 미시적인 ‘사이’의 관계망에 (한편으로 통제와 감시의 효율성이 극대화된 유토피아의 그것과는 분명하게 차별되는) 의해 구축된다는 것을 지각케 한다. 이러한 일련의 수행적인 자각 속에서 관람자는 방 바깥의 열린 공간에 놓인 평범한 일상의 단면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갖게 된다. (전리해가 관습적으로 타자의 영역으로 인지되는 성매매 지역을 현실성이 강한 컬러사진으로 작업한 것과는 달리 일상과 가깝게 여겨지는 모습들은 기록적인 느낌의 흑백사진으로 촬영하여 전시장에서 생태표본처럼 보이게 한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매매 장소의 지근에 위치한 초등학교와 낮에는 제도적으로 분할된 주차장이지만 밤에는 포장마차 거리로 변하는 골목길, 그리고 폐쇄적인 성매매 집결지 안에 있을 법한 누군가를 상기시키는 동물원의 얼룩말에 이르기까지, 이 낱낱의 단면은 다중적인 시공간의 층위로 작가의 주변을 둘러싸는 일상의 모습을 탈-시간적인 전시 공간 속에서 평면적인 조각난 거울의 몽타주처럼 재구성한다. 다시 말해 우리의 일상과 그리 멀지 않은 것 같으면서도 박물관의 박제마냥 낯설게 다가오는 이 사진들은 제도화된 공간 속에서 일상과는 분절된 채 무덤덤하게 역사화 되어버린 타자로서의 우리 삶을 상기시키는 또 하나의 자각적인 시뮬라크르인 것이다. 누군가 폐쇄된 방 속에서 자기 외화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와 받아쓰기를 체험했다면 이러한 그/그녀의 삶 또한 응시의 체계 속에서 주조되는 ‘다른 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감지하기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전리해가 거리의 갈라진 벽면 위에 걸려있는 거울을 찍은 사진에서 거울은 그것이 걸려있는 벽면의 구성이자 그 맞은편에 있는 작가와 그녀가 서있는 장소의 타블로로서 거울을 둘러싼 모든 시공간과 포괄적으로 연결된다. 여기서 거울은 벽면이라는 장소 안에 위치하지만 벽면의 바깥인 정반대의 공간을 지시한다. 반대로 전리해는 자신이 존재하는 장소 바깥의 거울공간으로부터 그녀와 자신을 에워싸는 장소를 바라본다. 자신이 거울에 집중할수록 그녀의 시선은 거울이 위치한 장소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태연한 기울기>의 폐쇄적인 방에서 성매매 집결지의 장소적 의미 안으로 다가갈수록 그곳의 바깥이라고 여겨왔던 우리의 일상 그 자체의 의미에 다가서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태연하게 기울어져버린 영상 속의 성매매 집결지로부터 우리의 기울어진 일상을 바라본다. 관습적이라는 미명하에 타자를 정의하고 타자화의 공간을 구축하는 삶의 기울기가 있는 곳, 우리의 일상을 떠도는 장소가 없는 장소로서의 헤테로토피아는 우리 스스로가 집단적으로 일상으로부터 소외되어 스스로를 타자로서 바라보거나 타자의 꿈을 꾸게 하는 현실 속의 비현실적인 공간이다. 마치 성매매의 공간이 특정한 장소가 필요한 곳이 아니듯, 성매매라는 행위로 환원되는 육체의 상품화가 제도적인 지도 위에 배치된 특정한 장소와 무관하듯, 나아가 삶의 실존이 모더니티의 유토피아적인 기능과 형식을 벗어나서 떠다니는 공간 위에 존재하듯, (마치 주차장 위에 세워지고 아침이면 홀연히 사라지는 포장마차처럼, 때로는 일상에서 걸그룹의 아이돌이 되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타자를 향한 꿈이 생성되는 무정형의 공간처럼) 전리해의 <태연한 기울기>는 비현실적인 현실이 일상화된 우리의 삶의 풍경을 우리가 부재한 타자의 공간을 통해 바라보게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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