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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의 가장자리⪢

  - 놔둠과 방치, 재활용이라는 사회적 엔트로피 법칙 너머로 

 

                                         손영실(경일대 사진영상학부 교수)

 

전리해 작가는 ⪡지도의 가장자리⪢ 전을 통해 대구의 자갈마당에서 경산의 코발트 광산에 이르는 한국 근현대역사 속의 상처들을 보여준다. 여기서 상처들은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해 해방 전후기를 거친 후 지금까지 가리거나 심지어 은폐된 채, 이 장소들에서 진행되어왔던 부정적 역사의 구체적 표상들일 수 있다. 

 그녀가 드러내려는 상처의 역사에서 출발점은 대구 자갈마당이다. 이곳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경 일본에 의해 만들어진 유곽들이 운영되었던 장소였다. 1910년은 경산 평산동의 코발트 광산과도 관련이 있다. 그 해에 광업법이 제정되면서 일본이 조선의 광산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에 보국 코발트 광산이라 불렸고 1930년대 이후에는 이곳에서 발견된 금, 은, 코발트광 등이 일제의 군수품 제작에 사용되었다. 1937년에는 춘길광업소로, 1944년에는 보국코발트광업회사로 변경되었고, 이후 일본군수회사로 지정됐다. 코발트 광산은 일본 제국주의가 태평양 전쟁에 필요한 무기를 만들기 위해 개발한 식민지 수탈의 현장이었고, 일본식 유곽은 식민지 수탈 체제의 안정화/공고화와 관련된 왜곡된 성적 소비 현장이자 일종의 하급문화였다. 

부정적 역사는 이후에도 계속됐다. 자갈마당은 한국전쟁 전후에는 위안소로, 60년대 이후에는 성매매 업소가 모인 성매매 집결지로 성행했다. 2019년에서야 전부 철거되었다. 코발트 광산은 6.25 전쟁 중에는 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 현장이 되었다. 주민들에 따르면 학살은 1950년 7월부터 9월까지 계속되었고 약 3천 50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코발트 광산의 갱도 위쪽은 현재 골프장으로 활용되고 있고 학살의 현장이었던 근처 대원골은 아래에 영원히 묻혔다. 지금 남아있는 현장이 겨우 보존되고 있는 데에는, 유족들의 절규와도 같은 요청이 있다. 고령의 유족들이 사망한 이후에는 어떻게 될까. 땅에, 시간에, 망각에 묻힐 비극적 광산이라니. 아니, 그보다 무지라는 흙에 이미 묻혀있었던 광산이었다. 2009년 11월 17일 진실화해위원회는 경산 코발트 광산 등지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 사건은 군·경에 의한 집단 학살이며 명백한 불법이라고 판정했고 우리 모두가 비극적 역사를 알게 된 시점이다. 

이처럼 두 장소는 부정적 역사와 그것에 대한 공동체의 기억을 지워버리려는 사회적 경향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실, 일제 치하 탄광들의 대부분은 성공적으로 철거되거나 훼손되었고 은폐되었다. 경산 코발트 광산 터의 상당 부분은 골프장이 되며 비극적 이야기는 그렇게 성공적으로 세탁되고 포장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의 시대적 경향과 무관하지 않다.

 

자갈마당은 우리 주변에 포함되면서도 동시에 일상으로부터 제외된 채로 존재하는 장소였다. 작가가 여성인권센터 활동가들과 함께 집결지로 들어가 직접 촬영하거나 철거 후 그곳을 기록한 작업인《태연한 기울기》(2015), 《자갈마당 Ja-gal-ma-dang》(2017),《흰 밤 검은 낮》(2019) 은 장소와 삶을 교차시키는 구체적인 상황들 속에서 예술적, 역사적 부식 혹은 침식에 저항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경산 코발트 광산은 역사적 사건의 흔적만이 남아 있어 작가는 이동하의 자전적 소설, 피해자 유족의 구술 인터뷰 자료를 토대로 사진, 텍스트, 오브제, 사운드 작업을 진행했다. 

그렇다면 가려진 역사를 드러내는 일은 늘 최선일까. 어떤 맥락에서 진행될 수 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경우 상처 아래에서 작동해왔던 문제들까지 드러내는 이들과 상처 그 자체에만 주목해 이를 예술적으로 어떻게 표현할지에 관해 주로 고민하는 예술가들의 두 부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상처 그 자체에만 주의하는 것을 상처의 현상학이라고 불러보자. 상처의 원인을 드러낼 사회적 혹은 미학적 책임이 작가에게만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가 어설피 그 원인에 주목해 어설프게 포착하거나 표현함으로써 관중들에게 의도와 달리 거부감을 주고 그들의 시야를 오히려 원인으로부터 돌릴 수 있다. 어설픈 참여주의 작가들이 보여왔던 전략적 실수다. 작가가 상처의 현상학을 예술적으로 잘 표현하면 관객이 그 상처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런 그들이 스스로 상처의 원인에 대해 알아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 어쩌면 이런 성공적 유도를 자아내는 상처의 미학적 현상학이 예술가들의 본령일 수도 있다.

《공작의 세계》(2021)는 이동하의 소설 《우울한 귀향》에서 거론된 공간들, 특히 깊은 산골짜기에 있는 폐광을 작가가 찾아가 그것들을 촬영해서 만든 작품이다. 옛 모습과 비교해 많이 변해버린 코발트 광산, 마을의 골목, 학교 교정, 간이역 등을 다시 바라보면서, 풍경이라는 존재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제약하는 작가 고유의 주관적/인식론적 시선을 보고했다. 여기에 《우울한 귀향》 속 발췌된 문장들이 결합한다.

《공작의 세계》가 아스라한 기억이라는 방식을 통한 상처의 현상학을 보여주었다면, 《나팔소리 3500》(2021)은 강렬한 감정을 자극하고 환기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학살이 일어나기 전의 불길한 전운을 예고하는 듯한 나팔 소리가 들리고, 희생자 3,500여 명의 삶의 흔적을 한 사람 한 사람 점을 찍듯 북을 두드리는 타악기 연주가 반복된다. 북소리가 끝나면 어둠 속에 반딧불이 허공에 흩어지는 듯한 사운드로 마무리된다. 조형 예술가가 제작한 사운드 아트는 이 시대의 어떤 음악가도 다루지 않은 학살사건을 간결하면서도 격렬한 소리 소재로 표현하였는바, 학살로 없어진 소중한 삶과 관련한 상처의 현상학을 잘 보여주고 있다.

《신문기자 C의 진실 규명 작업 일지》(2021)는 경산신문 최승호 기자가 코발트 광산의 민간인 학살사건을 연대별(1950~2020년)로 작성하고 기록한 일지와 광산 주변에서 채집한 들풀을 중첩해 만든 하이브리드 이미지다. 일종의 포토그램 방식으로 제작되었고 코발트 광산의 기억을 상기하기 위해 시아노타입(cyanotype)의 블루 색감이 드러나도록 제작했다. 

자갈마당은 유곽과 비슷한 용도로 최근까지 사용되어왔는데 그러한 재활용은 사람들이 이전의 활용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 탓이다. 자갈마당과 코발트 광산은 장소만이 아니라, 100년이 넘는 시간의 표상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특정한 시공간이며 탈역사적 오브제가 된다. 탈역사적 오브제에서 사람들이 보는 것은 곰팡이, 악취, 마모, 부서짐 등 자연적/물리적 엔트로피 법칙의 구현이다. 물리적 시공간이자 역사적 서사가 있는 그곳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진짜 대상은 상처에 신경 쓰지 않는 이들에 의한 동시대의 방조이기도 하다. 무질서해지는 자연의 경향이 가속되는 세계에서 역사적 상처는 기억되지 않고 잊힐 수 있다. 때로 곰팡이와 악취로 표현되는 무질서는 잊힌 상처를 가리는 폭력일 수도 있다. 상처를 기억하려는 의지는 치유와 예술을 유도하며 작가의 예술적 발언이 공고해지는 지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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